북촌마을 4·3길 (2025.9.10. 수)
계절의 변화와 함께 찾아온 예측 불가 국지성 폭우
너븐숭이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퍼붓는 비
하지만...
북촌마을은 비가 내린 흔적 없이 흐릿한 가을날씨가 반긴다.

작지만 아름다움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천혜의 섬 다려도를 품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어촌마을 '북촌리'
오랜 설촌 역사와 수려한 자연과 문화를 지닌
마을 뒤, 또는 북쪽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뒷개라 불렀다.

널찍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뜻하는 '너븐숭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제주 4·3 사건 당시 하루에 가장 많은 희생이 있었던 북촌리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4·3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영상물을 관람하고
위령비, 희생자 각명비, 순이삼촌 비, 애기무덤, 방사탑 등
4·3 사건 유적지와 관련 장소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4·3 관련 영상물 관람 후
이상언 선생님의 해설을 시작으로 북촌마을 4·3길을 걸어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감춰진 거짓말 같은 아직까지도 생생한 가슴 저린 삶의 이야기
활동할 수 있는 젊은 남자, 어머니를 따라나선 어린아이와 집에 있다 불에 타 죽은 노인들까지
마을 인구 천여 명 중 1/3 가량이 희생된 북촌마을은
명절처럼 제사를 한 날 한 시에 지낸다.
학살과 강요된 침묵, 그리고 울음마저도 죄가 되었던 암울한 시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어 나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4·3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도민 3만여 명이 희생당하고 2천5백여 명이 군사 재판정에 섰던 사건이다.
그날의 뼈아픈 고통을 생생하게 몸으로 기억하는 생존자들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4·3 사건 당시 최대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는
1949년 1월 17일 북촌 대학살 현장의 한 곳으로
당시 이 일대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작은 봉분은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1978년 가을~
4·3을 소재로 한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
고초를 겪었던 제주출신 작가 현기영
비문이 없는 비석에 비문이 새겨지고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해진다.
너븐숭이 일대는 1949년 4·3 사건 당시 443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4·3의 아픔을 알리는 소설 '순이삼촌' 배경의 장소이기도 하다.
붉은 피로 상징되는 송이 위에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비석에는 사실에 바탕을 둔 소설 '순이삼촌'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총소리의 환청은 자주 일어난다.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 죽었지만...'


제주 4·3의 비운을 상생과 평화의 이름으로 말끔히 씻어주고
이 같은 액운이 다시는 이 땅 위에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마을의 안녕과 영원한 발전을 기원하는 상생, 평화, 번영의 탑이다.

이곳은 제주 4·3 사건의 최대 희생지인 북촌리민 대참사의 현장이다.
1949년 1월 17일 새벽....
너븐숭이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희생되면서 보복은 시작되었고
군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을 제외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한 사격으로
하루 만에 300여 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1949년 1월 17일 북촌 학살 때 북촌초등학교에 모인 북촌 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이곳 '당팟'으로 끌려와 곧바로 총살당했다.
당시 북촌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로 나누어 이루어졌고,
이곳 '당팟'에서는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마을의 현재이면서 4.3의 잔상 퐁낭(팽나무)

사원이물은 마을 본동에 있는 북촌의 대표적인 물통으로
'사온이물'이라고도 부르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사원이물의 수로는 식수 전용의 원형 물통과 식수통에서 자연히 흐르는 물을
채소를 씻거나 빨래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이 구분되었다.
특히 원형의 식수통은 북촌마을의 특징이며, 주민들이 식수통의 높이를 다르게 하여
밀물에 바닷물이 들어도 식수를 원활히 이용하려는 지혜가 돋보인다.
주민들의 소중한 생명수였던 산물이 잘 보전되어 있다.

조그만 용천수로 생이(참새)가 먹을 만큼 용출량이 적어 붙여진 이름이다.

도와치물은 안 성창의 한뱃땅 동쪽에 있으며,
용출량이 많아 대조기 물때에도 마르지 않으며 수질이 양호하여
주로 냇빌레 사람들 음용수로 이용되던 물이다.
도와치물은 세 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맨 위쪽은 먹는 물, 가운데는 채소 씻는 곳, 아래 칸은 몸을 헹구거나 빨래하는 곳이다.
또한 해녀들이 물질 후 이용하던 여자 전용 목욕탕이었으며
바깥 후미 쪽은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무장대에 의해 우도지서에 근무하던 경찰 2명이 희생되었던 4·3 역사현장이다.

북촌마을 포구 서쪽 구짓머루 동산에 위치한 옛 등대로
이곳 포구에 세워진 등명대는 속칭 '도대불'이라 한다.
바다에 나간 고기잡이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1915년에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
처음에는 솔칵으로 나중에는 석유 등으로 불을 밝혔다.
도대불 위에 세워진 비석에는 당시 군인들이 총질을 한 총탄 자국들이 남아있다.

가릿당은 북촌마을의 본향당으로
이곳의 신들은 북촌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호적과 피부병,
육아, 해녀, 어선 등을 관장한다.

불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오수처리 중계펌프장으로...
바닷가 염생식물들은 검은 현무암 위로 뿌리를 내리고
세찬 바닷바람과 짠내 나는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바닷가 지킴이가 되어준다.






북촌 본동 서쪽에 있는 용천수로 용출량은 많지 않지만
꾸준히 솟는 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집수, 보호시설이 되어 있어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북촌 환해장성은 왜구 등 바다로부터 오는
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쌓은 것으로
북촌의 환해장성은 260m 남짓의 현무암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검섯개는 북촌 본동과 해동 사이 바닷가에 있는 개(포구)를 말한다.
북촌 해동마을 서쪽 편에 가로누운 '서모오름'
서모오름(서산)은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리, 서쪽은 함덕리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져 해안가에 자리 잡은 서모오름은
조선시대 서산 봉수대가 있었고, 일제의 상처인 진지동굴 20여 개가 있다.
4·3의 아픈 역사와 북촌리의 희로애락을 한아름에 보듬어 안은
우리에 어머니의 품과 같은 오름이다.
북촌마을 주민들은 이 오름이 본래의 이름을 찾아서 서산이나
서모오름, 서모봉으로 불려지길 기대한다.

예전에는 용출량이 많아 해동 주민들이
식수 및 빨래터로 이용하였지만 주변 영향 등으로 인해 용출량이 현저히 줄었다.
일제 진지동굴 구축 시 일본군 대장이 먹었다 하여 '장군물'이라고도 불린다.


비췻빛 물결 영롱이는 해동마을
해동은 북촌리 설촌의 원류이며 서모오름 기슭에
삶의 터전을 이룬 전형적인 반농반어 마을이다.
서북풍을 막아주는 서모오름과 풍부한 수산자원의 보고인 다려도가 있어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곳으로 자연적인 포구가 발달하였다.
동굴진지로 가는 길에는
밭작물의 골치 덩어리 '칡'의 향기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1945년) 일본군이 결 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북촌리 서모봉 등사면에 인근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든 대장굴, 탄약고, 왕(王) 자형 동굴진지와
어뢰정용 동굴진지 등 20여 개가 있으며 상태가 양호하다.

갱도 앞부분에는 직사화기로부터
방어나 엄폐, 은폐를 위한 용도로 구축된 방호벽 시설들이 보인다.




가장 접근하기 좋은 동굴진지는
굴 입구가 3개인데 내부가 연결된 왕(王) 자형으로
마을 사람들은 '삼 형제굴'이라고 한다.




이 시설물들은 제주도민뿐 아니라 다른 지방 사람들까지 동원돼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서모오름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에는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세찬 바닷바람과 맞서며 한쪽 방향으로 드러누웠다.
기특하게도 강한 생명력으로 잘 견디며 오랜 시간을 서모오름과 함께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조선시대 제주도내에는 25개의 봉수대와 38개의 연대가 설치되어
유사시에 적정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동쪽으로 입산, 서쪽으로 원당 봉수대와 연락망이 이루어져 있었다.

다려도는 3~4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무인도로
마을 해안에서 400여 미터 거리에 있으며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해 주고, 다양한 철새들의 월하, 월동지로
북촌리 마을 자원을 대표하는 보물섬이다.
고지도에는 많을 '다', 올 '래', 돌이름 '여'를 사용하여 '다래여(多來礖)'로 표기했다.
바닷속의 크고 작은 바위를 포함한 여(礖)
나와 있는 여 '난여', 잠겨 있는 여 '든여', 숨바꼭질하는 여 '고분여' 등
썰물일 때 모습을 드러내는 여는 바닷길을 만들어 오갈 수 있다고 하지만
물이 잠겨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와 여로 이동한다.

용물은 냇빌레 동쪽 바닷가 창꼼알에 있는 용천수로
물이 끓어오르듯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용물에서는 수달을 닮은 수려한 다려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이곳 용물은 청량하고 용출량이 많은 담수이기는 하나
소량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식수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나서 몸을 헹구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유독 수온이 낮아 한여름이면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물 맞는 곳으로 유명하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픈 고향
작지만 아름다움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천혜의 섬 다려도를 품은 '북촌리'
마을길을 걷는 내내 가슴 먹먹했던 쉬쉬하며 어머니를 가둬버린 잃어버린 시간
할머니 등에 업힌 채 다섯 살 외삼촌은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다.
'편 가르지 말앙 살암시믄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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