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 용천수를 따라 걷다~(2022.6.29. 수)
민족자존의 고장 '조천리'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조천은
동쪽으로 신흥리, 서쪽으로 신촌리, 남쪽으로 대흘리와 이웃한 마을로
조천 만세동산과 항일기념관, 비석거리, 연대, 연북정,
고가옥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천리 일대 20여 개소의 용천수들로 이어진 '용천수 탐방로'는
과거 제주민들의 삶과 지혜를 엿볼 수 있고 용천수의 역사와 전설을 알아갈 수 있는
아기자기한 돌담길, 잔잔한 바다와 용천수 등을 만날 수 있는 탐방로로
조천 지역에는 현재 30개 이상의 용천수가 남아 있다.
용천수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에
대수층을 따라 흐르다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을 의미한다.
용천수는 제주 마을 형성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의 희미해진 기억을 되짚어 꺼낸 이야기
용천수의 역사, 용천수와 함께 한 어르신들의 경험과 생활을 그대로 담아낸
제주인의 삶과 애환, 그리고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용천수 현장을 둘러볼 수 있도록
'이야기가 흐르는 조천 용천수 탐방길'이 조성되어 있다.
파란 하늘에 모여드는 구름,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례적인 무더위,
고된 시간을 달려온 잿빛 세상에 보상이라도 하는 듯
뙤약볕에 더위를 즐기는 바닷가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노란 황근은 햇살을 붙잡고
제주 냄새 물씬 풍기는 한적한 에메랄드빛 잔잔한 바닷가
궷물을 시작으로 역사· 문화가 함께하는 '조천 용천수 탐방길'에 나서본다.
바위나 궤(동굴)에 물이 있다 하여 '궷물'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주로 먹는 물로 사용했으며 오리, 원앙, 백로, 왜가리 등의 물새 서식지이다.
물이 맑고 풍부하여 먹는 물과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한때 이곳 주변에 두부 공장이 있었는데
이 물을 사용하여 만든 두부가 유독 고소하고 맛있었다고 한다.
용천수가 바위틈에서 뿜어져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만조라 물이 잠겨 용천수가 나오는 곳에서 물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수룩물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성들이 이 물로 덕을 닦았다고 하여 '수덕물' 이라고도 불린다.
조천의 여인들은 수룩물을 생명과 풍요의 물이라 여겨
이곳에다 제물을 차려 놓고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수룩물은 남탕과 여탕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탕이 먹는 물, 채소 씻는 물, 빨래하고 목욕하는 물 등으로 쓰임에 따라 칸이 나뉜 것과 달리
남탕은 칸 구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목욕만 했던 곳으로 보인다.
넓고 평평한 빌레(암반) 사이에서
솟아 나오는 물이어서 '앞빌레' 라고 부른다.
돼지를 잡을 때는 물이 많이 필요한데, 너른 빌레에서 나오는 빌레물은
가문 잔치에 쓸 돼지를 잡을 때에 제격이었다.
주택가와 가까운 용천수로
윗물에서는 채소를 씻고, 아랫물에서는 주로 빨래를 하였다.
지금도 이 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탐방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조천리 상동의 대표적인 노천탕으로
조천 용천수 중에 이 두 곳만 비가림 시설이 되어 있다.
남탕은 경치가 뛰어나고, 여탕은 아늑하다.
전형적인 제주의 용천수로 쓰임에 따라 세 칸으로 분류했다.
위 칸은 먹는 물로, 가운데 칸은 채소를 씻을 때, 맨 아래 칸은 빨래를 할 때 사용했다.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과 물에 잠긴 이끼 옷을 입은 아낙네 모습이 정겹다.
주변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태웠던
바위섬에 있는 물이라고 하여 '제주자리물' 이라고 부른다.
비가 오고 나면 주변에서 물이 솟아나 장관을 이뤘다고 하나 지금은 물이 적어 볼 수 없다.
'암반 사이로 용천수가 가늘게 솟아 나온다' 하여 세물이라고 한다.
다른 용천수에 비해 규모가 작고 물이 적으나 접근하기 쉬워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두말치물은 한 번에 두 말 정도의 물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말치물은 아이들이 목욕하던 장소로 중등에도 같은 이름의 용천수가 있다.
용천수를 둘러싼 돌담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허리춤 높이(1m 정도)의 돌담은
물허벅(물동이)을 등에 지기 전에 잠시 올려 두는 물팡(선반)의 용도로 사용했다.
중상동 마을 중심에 복원된 우물로
故한윤순 여사께서 마을 주민들의 안정적인 식수와 생활용수 확보를 위해
1930년대에 개인 소유의 토지에 조성하여 마을에 희사했다.
1969년도에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온 후
우물의 사용 가치가 적어지면서 그대로 방치되고
유지관리의 문제가 생기면서 우물은 매립되었고 공덕비도 우물 근처에 묻혔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우물을 원형 복원하고 공덕비를 발굴하여
선인들의 애환이 깃든 사랑과 나눔의 봉사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는
안내글 내용이다.
개낭개의 대표적인 남탕이다.
주변 지역의 원담에서 어로 작업을 한 후 이곳에서 몸을 씻었는데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성인들도 입수하여 2분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곳 주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승상 용암(새끼줄 모양 용암)은
제주가 화산섬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바닷가에는 염생식물의 천국이다.
척박하고 염분이 많은 땅에서도 끄떡없는 생명력,
퍼부어대는 비와 바닷바람에도 잘 견디는 염생식물들은
바닷가 악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식물 몸 속으로 들어오는 염분을 차단하거나 저장했다가 밖으로 배출하기도 하고
염분을 주위의 물기를 빨아올리기 위해 통통한 잎을 갖기도 한다.
개낭개엉물은 전형적인 제주의 용천수로 쓰임에 따라 세 칸으로 분류했다.
위 칸은 먹는 물로, 가운데 칸은 채소를 씻을 때,
아래 칸은 빨래를 할 때 사용했다.
수로가 바다 방향이 아닌 마을 방향으로 나 있는 것이 특징이며
다른 용천수와 달리 장마 때도 맑은 물이 계속 솟아올라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용천수 입구 모양이 '족박(작은 바가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진사 절 북쪽 마당 한가운데 우물처럼 되어 있고, 물이 깊고 밀물 때만 물이 솟는다.
빌레물(양진사물)은 절(양진사) 안에 있는 용천수로
식수 및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을 하였으며
특히 이곳은 2중 구조로 되어 있어 스님들의 수련을 하다가
심신의 피로를 달래기 위해 목욕을 하기도 하던 곳이다.
두말치물은 한 번에 두 말 정도의 물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제주송이 맨발 걷기, 용천수 발 담그기 등의 체험이 가능하고
상동에도 같은 이름의 용천수가 있고, 이곳(중동)의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답다.
장수물은 크기가 크고 물이 많아서
설문대 할망이 한 발은 장수물에, 또 한 발은 관탈섬에 디디고
빨래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다리를 놓으면서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물이 많고
다리 밑에는 용천수를 둘러쌓았던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북정(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은
조천포구 '조천 진성' 위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정자로
옛날 제주에 파견된 관리들이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곳이다.
조천포구는 화북포와 함께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고
순풍이 불어 귀경할 날을 기다리는 후퐁소(候風所)이기도 했다.
생이물은 물이 솟아 흘러내리는 모양이
마치 '생이(참새) 입 모양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출량이 매우 적어 생이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흐르는 물을 의미한다.
주변에 살던 돈지 영감이 먹는 물로 사용하였던 용천수라 한다.
지금은 용천수를 둘러싼 돌담이 무너져 있는데
밀물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돈지 영감의 이름을 따 족은(작은) 돈지라 불렀다.
남자들이 목욕할 때만 사용해 공간의 구분 없이 한 통으로 되어 있다.
큰물은 조천리 용천수 중에 제일 크고 넓으며
솟아나는 물의 양이 많아 큰물이라 하였다.
용출량이 풍부하여 주로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으며
먹는 물을 비롯하여 채소 씻는 물, 빨래하는 물, 목욕하는 물로 사용했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으로
조천연대는 서쪽으로 원당봉수, 동쪽으로 왜포연대와 교신했다.
봉수대는 산 정상에, 연대는 주로 해변이나 구릉에 설치했다.
설문대할망이 육지로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했던
전설의 장소 '엄장매(엉장매)' 코지 맞은 편에 위치한
이들물은 만조 때에도 먹는 물로 사용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마을과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물을 뜨러 왔다.
또한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돼지를 잡기도 했다.
제주의 마을은 저마다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제주 정신과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설촌의 역사와 제주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산물(용천수)
과거부터 마을의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되었지만 점점 사라져 가는 현실이다.
용천수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마을 주민은 물론 도민 모두의 자주의식이 절실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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