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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유산답사

추사유배길~(1코스-집념의길)

by 고니62 2015. 4. 16.

추사유배길~(1코스-집념의길) 2015.4.12.일

 

크고 조용한 대정골~

 대정고을은 왼쪽 단산과 산방산 오른쪽에 모슬봉

뒤에는 넓게 오름이 외곽을 이루고 지형은 용암평원으로 되어 있다.

대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대정현을 설치할 당시 대정고을 서쪽에 '한괴'라는 이름에서

'한'은 크다, 많다의 뜻이므로 대(大)자로 하고

'괴'는 조용하고 정숙한 곳이므로 정(靜)을 사용하여 '대정'이라 정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18년 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정성을 축성한 후 주민들이 성을 중심으로 부락이 형성되었으며

동쪽마을을 동성리, 서쪽마을을 서성리라 하였다.

현재 안성리, 인성리, 구억리, 보성리, 신평리

5개 마을을 합쳐서 대정고을이라 불린다.

 

답사경로는

대정향교~추사의 전각~새미물~인성리 시범조림지비~남문앞못~

대정현감비~동문밧 산짓당~삼의사비~제주추사관~추사적거비~강도순집~

송죽사터~송계순집터~대정현성 북문 옹성~창터~대정골 돌하르방~대정 우물터~

이도종목사 순교기념비~수월이못~정난주마리아의묘


[대정향교(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4호)]

 

대정향교는 1420년(세종2)에 대정성 북쪽에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옮겨지다 1653년(효종4) 현 위치에 옮겨 지어졌다.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잡고 그 북쪽에는 대성전으로 가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서 있다.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의전당, 내삼문, 전향문, 퇴출문, 대성문, 동정문, 전사청 등이 있다.

의문당(疑問堂)은 동재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가 나무판에 새긴 현판이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목적으로 세운 교육기관이다.

 

[대성전]

 

 [동재]

 

 [전사청]

 

 [현무암에 새긴 추사 김정희의 전각]

 

전각이라 함은 문인묵객들의 그림이나 글씨에 도장을 찍기 위해

나무나 돌 등에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낙관'이라고도 한다.

추사 김정희의 호는 100개가 넘었기에

인장 또한 많았음이 짐작이 간다.

 

[새미물]

 

옛날 주변 마을에서 물을 길어 먹었던 곳이다.

세미물 또는 돌세미(石泉)라 불리기도 하는데

추사 김정희가 이곳의 물을 길러다가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인성리 시범조림지비]

 

 

 

[남문앞 못]

 

원래의 못은 우마급수장으로 활용하였던 못으로

외부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성작업을 하던 중

모슬봉의 화기가 비치니 남문앞에 연못을 파서 화기를 누르면

백성들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하여 설치된 못으로

지금까지도 마을 주민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연못이다.

  

 

[대정현감비(大靜縣監碑)]

 

이 일대는 옛 대정현 무사들이 궁술을 익혀온 곳으로 연무정과 사장못, 비석거리가 있었다.

여기 두분(현감 박상율, 군수 김몽구)의 비석은

연무정이 위치했던 안성리 복지회관 뒷밭에 방치했던 것을

2007년 6월에 이 곳으로 옮겼다.

 

 

밭담 너머로 봄바람에 작게 흔들거리는 연초록의 청보리가

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농로를 걷노라니

잠시 어린시절 뛰놀던 내 고향이 생각난다.

 

[안성리 동문밧 산짓당]

 

안성리의 본향당이며, 당신은 '산짓당일뤠중저' 라는 여신이다.

제단 북쪽으로 보리밥나무에는 지전과 물색이 걸려 있다.

돌담을 두르고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었는데

'궤' 아래는 당신(堂神)께 올렸던 과일이 보인다.

 

 

당을 나오며 바라 본 아름다운 당올레의 끝에는 희망이란 밝은 빛이 보인다.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봉세관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1901년 5월 제주도민들이 봉기한 사건인 '이재수의 난'의

강우백, 이재수, 오대현 등 세 의사(義士)를 기려 세운 비이다.

 

[돌하르방]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등으로 불려지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던 것이다.

현재는 제주대학교, 시청, 삼성혈, 관덕정 등 제주시내 21기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12기

대정읍의 인성, 안성, 보성 12기 등 도합 45기가 있다.

 

석상의 형태는 대체로 벙거리형 모자,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큼직막한 주먹코, 꼭 다문 입, 배 위아래로 얹은 두 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석상은 성문 앞에 세워지면서 수호신적, 주술종교적, 경계금표적 기능을 지녔듯이

육지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추사유물전시관]

 

추사관은 김정희가 귀양살이하며 그린 '세한도' 속의 건물로

추사유배지의 유물전시관이다.

 

 

 

[강도순집(김정희 유배지)]

 

울타리가 된 탱자나무의 하얀꽃은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고운 향기로 김정희가 살던 집으로 길을 내어 줍니다.

 

[안거리(안채)]

 

안거리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전한다.

 

[밖거리(바깥채)]

 

밖거리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 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거리(별채)]

 

모거리는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 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계순 집터]

 

추사가 유배와서 첫번째 머물던 곳으로 2년 동안 생활하였다.

 

 

 

담장 너머로 살짝 보이는 '보춘화'의 모습이 정갈하게 보입니다.

 

[대정성지]

 

대정성지는 조선 태종 18년에 대정현감 유신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며

보성, 인성, 안성 일대에 걸쳐 있다.

남문 세 개의 성문이 세워졌는데,

문 위에는 누각이 문 앞에는 돌하르방이 있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 등이 있었고

십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왜적의 침입을 알렸다.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이 성은 집과 밭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제주에서 흔히 보이는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성벽에서 당시의 축성법을 엿볼 수 있다.

 

 

 

대정현 북성 위로 보이는 옹성

 

 

[창터]

 

대정현이 설치된 이후에 창고로 쓰였던 진휼창 등의 건물들이 있던 곳으로

흔히 '창터'라고 불리는데 바닥에는 기와조각들이 널려져 있다.

 

 

 

[대정골 돌하르방]

 

대정현성 내 보성초등학교 입구 좌우에 있다.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 주며 기원하는 수호신적· 주술종교적 의미와

도읍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경계 금표적 기능을 한다.

아마 보성초등학교의 어린이들은 키 작은 돌하르방이 잘 지켜주고 있으리라..

 

 

 

[대정우물터]

 

이 못은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이라는 데서 '두레물'이라 불리던 것이 후에

 한자표기에 의해서 '거수정' 이라 호칭하며

이 물은 옛날 대정골의 유일한 못으로

유력한 명관이 추대되면 물이 말랐다가도 용출하고

만약에 그렇지 못한 이가 추대되면 용출되던 물이라도 금시 말라붙어 버렸다고 한다.

 

[이재수 생가]

 

 

 

[대정교회]

 

[제주 1호 목사 순교자 이도종 목사 성지]

 

산방산 돌로 새긴 기념비는 이도종 목사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

그리고 마지막에 흘린 피의 값을 결코 잊지말자며 인성(대정)교회 교인들이 세운 순교 기념비가 있다.

 

순교자의 생명의 값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돌비(石碑)에 새기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심비(心碑)에 새기어

오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되고 있다.

 

 

 

[수월이 못]

 

조선시대 후기에 만든 대정골에서 가장 큰 인공연못으로

큰 연못과 2개의 작은 연못으로 되어 있고

은연못은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안성리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 백서사건'의 당사자인 황사영의 처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어머니와 처, 아들(황경한)은 유배형을 받아

제주도 대정현의 노비로 귀속된다.

 

며칠을 둘러 보아도 모자랄 곳을 하루 일정으로 다녀 온

역사가 숨쉬는 대정골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씁쓸하면서도 제주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내게 자부심이 자꾸만 생겨난다.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는 제주의 역사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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